Reviewryeok Vol.1
Home ( ) Home
연도 2020
크기 5 × 276cm
재료 Mixed Media
작가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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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2020
크기 5 × 276cm
재료 Mixed Media
작가 김지윤
매일 ‘불완전함’에 뒤덮여 살아간다. 스쳐 지나간 모든 작업은 아쉬움을 내뱉는 ‘하찮은 잔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일까, 새로운 무언가를 위해서는 유독 추상적인 단어들을 끌어오는 일이 잦다. 무형의 상태로 일상에 스며들어있는 추상적인 단어들은 내 모습과 닮은 구석이 많다. 분명한 가치가 존재하겠지만, 뚜렷하지는 않다. 개개인의 주관적인 해석이 모여 단어의 의미에 다가서듯, 시각화된 내 행위 자체도 내게 또다른 의미를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미미한 변화가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내 작업도 온전한 형체에 다가설 거라 믿는다.
기억의 형체2
―불가역 고유명사
우리는 기억으로 이루어져 숨 쉰다. 우리를 기억으로 두드리면 비로소 과거로부터 울리는 소리가 미래로, 아주 작은 음성이라도 닿을 것이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 결국 현재의 우리마저도 무언가로 정의하기엔 애매한 우주의 미립자. 과거와 미래가 주고받는 신호의 건널목에서 희미한 우리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현재의 자아를 기억으로 조립하며 애써 연명한다. 그렇다면 지윤이 기억의 형체를 포착한 것은 곧 현재와 그 속에서 떠도는 우리의 모습을 응시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울러 인체를 감싸는 패브릭 더미는 현재에서 현재를 정의할 수 없는 한계점을 시각적으로 해소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나는 어디에 있고,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 다가서게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추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상에 부유하지만, 추상은 언제나 우리를 희롱하므로.
시간은 단일한 형태가 아닌 작은 점들이 연속을 이루는 모양. 1초, 2초, 3초. 단위로 시간을 세어 보자. 3초를 이루는 점들 속에 있는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의 우리다. 연속하는 순간 순간의 우리가 다른 존재라면, 그 개별의 존재들은 속성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완벽히 일치할 수 없는 기억. 그리하여 불완전한 자아들. 지윤은 이러한 모호한 기억의 속성을 다양한 원단의 색 조합과 다소 거친 봉제 처리로 소화해냈다.
«기억의 형체2»는 형태의 무한한 가변성으로 인해 그것을 두르고 있는 이의 시야 확보가 불확실하다. 감긴 기억이 주는 시야에 대한 간섭은 곧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의 필연적 본능을 의미한다. 개중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시간과 기억을 활성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발성이다. 시간은 대체로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데 반해, 우리는 과거를 향해 회귀하며 우리를 형성하는 기억들을 활성화한다. 반대로 진행하는 것들은 언제나 마찰하고 주변의 것들에 긴장을 가하므로. 그렇게 우리는 더더욱 무한한 불완전함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수없이 뒤틀리고, 그래서 외로움을 짊어지고. 기억을 곱씹을수록 공허한 염증으로 뒤덮히기도 한다.
가변성과 모호성의 속성을 지닌 기억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패브릭 더미의 모형의 모델을 네 종류로 한정해 제시한 부분은 다만 아쉽다. 개인의 기억을 한정적 형태로 특정하게 명명한 점은 자아실현의 차원에서 유의미하나, 그러한 자아실현은 자칫 작업의 본질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억에 대한 지윤의 사유는 특정할 수 없는 추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다. 개인과 개인이 모이면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하므로, 개인과 기억 간 상관관계를 들여다 본 것으로 하여금 소통에서 발현하는 기억의 속성을 가늠하기 충분하다. 이는 편견(발화자로부터 생성되는)일 수도 있고 사연(수화자로부터 생성되는)일 수도 있으며, 이들을 가늠할 수 있는 시선과 그럼으로써 발휘되는 미덕(이를테면 ‘기억됨의 차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바야흐로 차후 지윤의 작업에 기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기수
―불가역 고유명사
우리는 기억으로 이루어져 숨 쉰다. 우리를 기억으로 두드리면 비로소 과거로부터 울리는 소리가 미래로, 아주 작은 음성이라도 닿을 것이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 결국 현재의 우리마저도 무언가로 정의하기엔 애매한 우주의 미립자. 과거와 미래가 주고받는 신호의 건널목에서 희미한 우리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현재의 자아를 기억으로 조립하며 애써 연명한다. 그렇다면 지윤이 기억의 형체를 포착한 것은 곧 현재와 그 속에서 떠도는 우리의 모습을 응시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울러 인체를 감싸는 패브릭 더미는 현재에서 현재를 정의할 수 없는 한계점을 시각적으로 해소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나는 어디에 있고, 누구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 다가서게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추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상에 부유하지만, 추상은 언제나 우리를 희롱하므로.
시간은 단일한 형태가 아닌 작은 점들이 연속을 이루는 모양. 1초, 2초, 3초. 단위로 시간을 세어 보자. 3초를 이루는 점들 속에 있는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의 우리다. 연속하는 순간 순간의 우리가 다른 존재라면, 그 개별의 존재들은 속성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완벽히 일치할 수 없는 기억. 그리하여 불완전한 자아들. 지윤은 이러한 모호한 기억의 속성을 다양한 원단의 색 조합과 다소 거친 봉제 처리로 소화해냈다.
«기억의 형체2»는 형태의 무한한 가변성으로 인해 그것을 두르고 있는 이의 시야 확보가 불확실하다. 감긴 기억이 주는 시야에 대한 간섭은 곧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의 필연적 본능을 의미한다. 개중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시간과 기억을 활성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발성이다. 시간은 대체로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데 반해, 우리는 과거를 향해 회귀하며 우리를 형성하는 기억들을 활성화한다. 반대로 진행하는 것들은 언제나 마찰하고 주변의 것들에 긴장을 가하므로. 그렇게 우리는 더더욱 무한한 불완전함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수없이 뒤틀리고, 그래서 외로움을 짊어지고. 기억을 곱씹을수록 공허한 염증으로 뒤덮히기도 한다.
가변성과 모호성의 속성을 지닌 기억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패브릭 더미의 모형의 모델을 네 종류로 한정해 제시한 부분은 다만 아쉽다. 개인의 기억을 한정적 형태로 특정하게 명명한 점은 자아실현의 차원에서 유의미하나, 그러한 자아실현은 자칫 작업의 본질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억에 대한 지윤의 사유는 특정할 수 없는 추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다. 개인과 개인이 모이면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하므로, 개인과 기억 간 상관관계를 들여다 본 것으로 하여금 소통에서 발현하는 기억의 속성을 가늠하기 충분하다. 이는 편견(발화자로부터 생성되는)일 수도 있고 사연(수화자로부터 생성되는)일 수도 있으며, 이들을 가늠할 수 있는 시선과 그럼으로써 발휘되는 미덕(이를테면 ‘기억됨의 차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바야흐로 차후 지윤의 작업에 기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