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ryeok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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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2019
재료 Mixed Media
작가 연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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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2019
재료 Mixed Media
작가 연나연
연나연은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탐구하고, 실험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폐관섬»(2020)은 이러한 관심사를 반영한 시작으로써,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질세계에 맞닿은 신체를 조정한다. 이는 정신에서 시작한 발화점이 물질에서 이야기되다가 다시 심리 변화라는 정신의 테두리에 들어온 것으로, 현실 세계에서 인지 과정을 가시화하고 인식하는 첫걸음이 된다. 폐관섬이 심리와 신체의 연동을 밝혀 정신과 물질의 상관관계를 말했다면, 이후 작업은 외면과 내면의 일체화라는 신화의 매커니즘에 주목하여 진행하려고 한다. 신화는 자연 현상에 대한 묘사, 유추, 설명과 더불어 그를 보고 발생한 마음의 움직임이 한데 융합되어 기술된 장르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을 없애 일체화된 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런 일체화에 집중하여 이전과 다른 형의 물질—정신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폐관섬
―폐관
고립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조용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남겨진 먹먹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렇다면 자발적 고립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고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단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상황일 것이다. 폐관섬에서 고립될 수 없는 상황은 작가가 약 20년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시끄럽고 혼란한 홍대 거리로 그려진다.
이러한 고립되기 어려운 상황에서마저 고립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노숙자이다. 그들은 슬프고도 신비롭게도 소외된다.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거리에 당연히 존재하는 어떤 물체 정도쯤 여겨지는 것이다. 연나연은 그들로부터 작업 형태의 모티프를 얻었다. 선택할 수 없던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고립을 실천하기 위해, 등에는 거대한 감각차단장치를 지고 강제적으로 주입했던 감각들을 잃기로 결정했다. 차단, 고정, 환기를 수행하는 ‘장치’라는 명칭에 비해 딱딱하지 않고 연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물체들은 진화한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작가의 몸에 밀착해 ‘폐관’을 실천하는, 독립된 ‘섬’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폐관섬»의 모습은 온전히 고립되고 싶다기에는 오히려 눈길을 끄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눈 밖에 나기를 바라면서도 시선을 독차지한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자발적 고립이라는 상태는 결국 불가능하며, 그렇게 이름 붙은 수행은 실은 타인의 구제를 갈구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게 한다.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 자발적 고립을 택할 지경까지 이른 개인을 발견해달라는 외침일지도 모르기에.
묘하게도 이 섬은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무런 것도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맡지 못하며, 감각할 수 없는, 곧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특히 작가가 감각차단장치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다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은 마치 독무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때 관람객의 눈에 비치는 것은 인물이라기보다는 거리 위의 조형물, 즉 생명력이 없는 무생물이다.
시각적 공해, 악취, 소음에 의해 일시적으로 훼손되는 감각은, 선택할 수 없는 강압적 상황에서 상처 입는 순간을 대변한다. 그러한 순간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으로 작가는 자발적 고립, 곧 죽음을 제시한다. 이미 조성된 환경에서 강요된 적응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은 차례차례 자신의 감각을 차단하고 결국 완전한 고립인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무기력한 듯 보이는 이 결말은 말한다. 실은 나름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이름
―폐관
고립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이 조용하고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남겨진 먹먹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렇다면 자발적 고립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고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단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상황일 것이다. 폐관섬에서 고립될 수 없는 상황은 작가가 약 20년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시끄럽고 혼란한 홍대 거리로 그려진다.
이러한 고립되기 어려운 상황에서마저 고립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노숙자이다. 그들은 슬프고도 신비롭게도 소외된다. 같은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거리에 당연히 존재하는 어떤 물체 정도쯤 여겨지는 것이다. 연나연은 그들로부터 작업 형태의 모티프를 얻었다. 선택할 수 없던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고립을 실천하기 위해, 등에는 거대한 감각차단장치를 지고 강제적으로 주입했던 감각들을 잃기로 결정했다. 차단, 고정, 환기를 수행하는 ‘장치’라는 명칭에 비해 딱딱하지 않고 연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물체들은 진화한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작가의 몸에 밀착해 ‘폐관’을 실천하는, 독립된 ‘섬’이 된 것이다.
그러나 «폐관섬»의 모습은 온전히 고립되고 싶다기에는 오히려 눈길을 끄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업은 눈 밖에 나기를 바라면서도 시선을 독차지한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곧 자발적 고립이라는 상태는 결국 불가능하며, 그렇게 이름 붙은 수행은 실은 타인의 구제를 갈구하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게 한다. 모든 감각에서 벗어나 자발적 고립을 택할 지경까지 이른 개인을 발견해달라는 외침일지도 모르기에.
묘하게도 이 섬은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장치를 통해 작가는 아무런 것도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맡지 못하며, 감각할 수 없는, 곧 죽음의 상태에 이른다. 특히 작가가 감각차단장치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다 완전히 사라지는 장면은 마치 독무덤의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때 관람객의 눈에 비치는 것은 인물이라기보다는 거리 위의 조형물, 즉 생명력이 없는 무생물이다.
시각적 공해, 악취, 소음에 의해 일시적으로 훼손되는 감각은, 선택할 수 없는 강압적 상황에서 상처 입는 순간을 대변한다. 그러한 순간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으로 작가는 자발적 고립, 곧 죽음을 제시한다. 이미 조성된 환경에서 강요된 적응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은 차례차례 자신의 감각을 차단하고 결국 완전한 고립인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무기력한 듯 보이는 이 결말은 말한다. 실은 나름 노력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이름